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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육1]학습의 주체는 학부모도 교사도 아니다

등록일 : 2011.04.10 조회수 : 4,707

[부모 교육1]

 

학습의 주체는 학부모도 교사도 아니다.

 

용인종로기숙학원 부원장 김갑중

 

  오랫동안 기숙학원에서 재수생들과 상담을 하면서 느낀 공통점 중 하나가 재수를 하게 된 학생들 중에는 부모가 학원을 선택해 준다거나, 교재를 골라서 사다가 준다거나, 학생을 대신해서 부모가 선생님을 만나 부탁을 한다거나 등 학생으로 하여금 학습과정에서 선택의 기회와 시행착오의 기회를 뺏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러한 현상이 초등학교 때부터 장기적으로 지속되다보면 고등학교 시절 학습의 주도성이 없거나 적극성이 없는 학습 태도를 나타나게 된다. 즉 학습의 주체는 학부모도 교사도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데서 발생한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학습은 숨쉬고, 먹고, 자고, 마시는 일처럼 자연스런 유기체의 본능이다. 모든 생명체는 학습을 하는데, 기본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한다. 자녀는 꼼작없이 학습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터라 부모로서 할 일은 자녀가 학습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최상의 교사는 학습 과정에서 침묵을 지키는 파트너와 비슷하다.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학습을 위한 내용이나 교육 재료를 제공하긴 하지만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많으며 학습자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으며 오직 질문할 때만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기가 대단히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학습과정에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면 그의 행동을 직사각형 창([그림1]참조)의 문제없음 영역에 놓고 그를 가만 내버려두라.

 

[그림1]

학생이 해결해야 할 문제

(학생 소유의 문제)

<- 학생이 분노와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수용 분할선->

문제없음의 영역

<- 학생이 조용하고 느긋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

부모(교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

(부모나 교사 소유의 문제)

<- 학생이 책상 위에 무슨 낙서를 하고 있다.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녀가 학습 과정에서 모종의 문제 봉착하면 그의 행동을 [그림1]의 윗부분 - 학생 소유의 문제 -에 놓인 것으로 간주하라.

 

  학생이 ‘하루에 단어 100개 외우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해보자. 단어가 잘 외어지지 않고 힘들어 하며 울고 있다. 이럴 경우 문제는 부모가 아니라 바로 아이의 것이다.

 

  자녀의 좌절감과 괴로움을 정확하게 직사각형 창의 윗부분에 두면 부모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할 수 있다. 첫째, 상황이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이끈다.(혹은 아이 스스로 영어단어를 외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만든다.) 둘째, 다음과 같이 아이의 감정에 반응하는 적극적 듣기를 한다.

 

“ 잘 외어지지 않아 속상했구나.”

“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구나.”

 

  그러고 나면 아이는 대체로 자신이 이렇게 어려운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진심으로 알아 준다고 느끼면서 다시 학습 과정을 풀이 하게 마련이다. 아이는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라도 아니면 모레라도 끝끝내 영어단어 외우기의 방법을 알아 내고 만다.

 

  부모들은 분명 자녀가 알았으면 싶은 뭔가를 배우도록 그를 격려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점만은 반드시 유념하라. 어떻게 해도 자녀를 대신해서 그 뭔가를 배울 수는 없고, 더욱이 그가 그것을 배우도록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임을. 자녀가 탁구치는 법을 알았으면 하고 바란다고 해 보자. 부모는 ‘나-메세지’ 통해 아이에게 그 바람을 알릴 수 있다.(“ 탁구 어떻게 치는지 너한테 알려 주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아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당신이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시범 보이고 설명하고 부추겨 주는 일이 고작이다. 실제 학습은 전적으로 아이에게 달려 있다. 아이는 자신이 겪고 있는 어떤 문제 탓에 배움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아래 예에서 보듯이 이제 탁구를 배울 것이냐 말 것이냐는 전적으로 아이 문제로 넘어가고 , 당신은 아이가 원할 때까지 일단 가르침을 접어야 한다.

 

부모: 탁구 어떻게 치는지 너한테 알려 주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자녀: 저는 경기 잘 못하잖아요.

부모: (재빨리 적극적 듣기로 돌아서면서)탁구를 잘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로구라.

자녀: 예. 저는 매사에 아빠를 못 당하잖아요. 아직 키도 너무 작고요.

부모: (계속 적극적 듣기를 하면서) 키가 너무 작아서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상당히 언짢구나.

자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우리 카드놀이 하면 어때요? 그 놀이에서는 이기고 지는 데 키가 별 상관없잖아요.

부모: (적극적 듣기로) 네게는 그게 더 공평한 놀이일 것 같구나.

자녀: 예. 탁구는 좀더 크면 그 때 가서 차차 배울게요.

부모: 좋아

 

 

  탁구 같은 기술을 가르치는 일 역시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수와 학습은 오직 그림1 ‘문제 없음 영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학부모님들은, 특히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이 스스로에게 매우 남다르게 느껴질 때 간혹 이 사실을 까먹는다. 아래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해마다 봄이면 여러 가정에서 심심잖게 일어난다.

 

아빠: 자, 다시 소년 야구리그 시즌이 돌아왔다. 내일 레크에이션 센터에서 등록을 시작한다는 내용을 신문에서 봤다. 같이 가지 않을래?

아들: 글쎄요.

아빠: 글쎄요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 왜! 겨울 내내 손꼽아 기다려 왔던 절호의 찬스잖아? 맘만 먹으면 넌 등록할 수 있어.

아들: (아들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그러지 말고, 얘야, 너는 근동에서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어. 자 나는 네게 온 다시없는 기회를 놓치게 하고 싶지 않구나. 만일 아이였을 적에 이런 리그에서 경기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마 메이저리그에 가 있을지도 몰라.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이런 어리 적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네가 지금 잘 실감을 못해서 그런 것뿐이야. 가서 야구 장갑 가져와 봐라. 포크볼 어떻게 던지는지 시범삼아 보여 주마.

아들: 피곤해요. 숙제 할 것도 있고요. 어쨌든 밖은 너무 추워요.

아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너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나같이 좋은 환경인데도 알고 있는 모든 걸 가르쳐 주려는 이 애비를 번번이 맥 빠지게 하는구나. 고작 한다는 소리가 ‘밖은 너무 춥다’고? 좋아 무서운 타자들이 너를 앞지르게 된대도 난 이제 알 바 아니니 앞으로 다신 나한테 와서 징징거리지 마라!

아들: 알았어요

아빠: 뭐, 알았어?

아들: (자리를 뜨면서) 숙제 하러 가야 해요. 아빠 나중에 봐요.

아빠: (뒤통수에 대고) 내일 가서 당장 등록해, 알아들어?

 

  만일 아빠가 이렇게 아들을 몰아붙이는 대신 그의 감정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더라면 부자기간의 대화가 이렇게 썰렁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다. 야구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 일에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당시 아이는 포크볼이 아니라 그 보다 더한 기술이라도 배울 기분이 아니었으리라.

 

  당장 우리 아이가 남보다 영어 단어를 많이 모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또는 자식이 부모 마음을 몰라준다고 느끼는 순간, 그 사실에 부모는 스트레스 받고 ‘내 아이가 뒤처지는 건 아닐까’ 불안해 진다거나 ‘자식이 나를 무시하네’ 화가 나는 순간, 결국 멀리보지 못하고 부모의 적극적인 개입(돈 그리고 각종 물량공세)은 시작되고 아이는 ‘갈등과정 속에서의 선택’과 ‘실행의 자립심과 책임감’ 등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기는 셈이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라고 합리화 하는 부모가 되어 버린다.

 

  특히나 유년 시절의 이런 경험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학습에 대한 성과(즉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결국 고교시절 사춘기를 거치면서 공부와 관련된 스트레스를 회피하는 소극적인 학생이 된다. 또는 불안감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 혹은 장염과 같은 시험증후군에 시달리는 학생들도 심인적 요인이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완전한 부모는 없다. 주눅들 필요 없다.  그러나 자녀의 행복과 성공을 기대하는 부모라면 ‘학습’의 결과를 보다 ‘학습’의 과정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학생의 마음을 속 이야기를 듣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떨까. ‘적극적 듣기’의 자세를 배워야 겠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긍정성이 생긴다.